
붉은 눈의 묘황 卯皇
펭귄,로우 - 개 ,토끼
숨이 벅차올랐다. 아릿한 정신을 다잡으려 형편없이 떨리는 손을 억지로 쥐어 보았다.
손 안에는 검 손잡이가 묵직하게 감겼다. 금빛 머리를 쳐든 용은 검 끝에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 생명의 무게. 사람은 정말 쉽게 죽었다. 근육 사이를 날카롭게 헤집는 칼날은 빨아들인 혈액으로 이채를 띠었다.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이렇게나 순식간에 죽는구나. 이렇게나 약하구나, 사람은. 그는 제 발치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이를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사실 죽어가는 것이 아닌, 이미 죽어 있었다. 저것은 죽은 직후의 짧은 발버둥일 뿐.
그는 다리가 잘린 연체동물처럼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벌레 같은 놈. 차츰 숨을 고르며 고양되어 붉었던 뺨이 가라앉았다.
그때, 한 사람이 방문을 밀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로우!!!!”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어온 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항상 어쩔 줄 모르는 맹한 얼굴만 봤는데,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다. 경악, 그리고 공포. 여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눈동자. 로우는 짧게 감상하며 검을 놓았다. 피웅덩이가 묵직하게 튀었다.
“펭귄.”
그는 얄따란 미소를 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스러질 듯, 어깨는 잘게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희열로 차올랐다. 평소 영민하고 날카롭던 노란 눈동자는 살의라는 붉은 안광이 덧씌워져서, 펭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짧게 고민했다. 밖에서 소란스럽게 뛰어오는 소리가 여럿 들려오고 있었다. 옅은 등불만이 비치던 창은 횃불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로우가 천천히, 펭귄에게로 손을 뻗었다.
*
하늘 중의 하늘. 그 높다란 곳에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다. 세상의 진미를 죄다 가져다 놓은 용들의 궁이었다. 한눈을 팔 새면 눈이 휘둥그레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람 따위는 작은 점으로 보일 규모였다. 반질반질한 기와는 고풍스러운 세월감이 느껴졌고, 반듯한 돌길에는 모래 한 톨 없었다. 이래서 용궁, 용궁 하는구나. 펭귄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자신을 안내해주는 선임의 뒤를 절도 있게 따랐다. 어차피 매일 같이 출근해야 할 일터이니 앞으로 질리도록 볼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온 하늘을 다스리는 용황을 뵙는 첫 자리였다. 한눈팔다가 이 넓은 궁에서 길을 잃기라도 하면……. 괜한 상상에 등골이 오싹해져 고개를 털었다.
선임은 한 건물 앞에 도착하자 펭귄을 멈춰 세웠다. 그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부로 용안龍顏을 보아서는 안 되고,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귀 기울여서 듣고,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당부하는 말을 어기면 최소 사형이다. 펭귄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가능한 한 죽이며 편전便殿으로 발을 들였다. 군화를 신었는데도 발바닥에 감기듯 부드러운 융단이 길을 만들었고, 양옆으로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 있었다. 장내는 고요했다. 흔한 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그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선만이 따갑게 살갗을 찌르고 있었다. 숨결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숨을 참고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 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견공犬公은 무릎을 꿇으시오.”
펭귄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한 발을 뒤로 물리고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위임받는 자리라 갖춰 입은 군복에서는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투구를 벗자 눌려 있던 검은 개의 귀가 올라오며 여태까지 그림자로 가려져 있던 얼굴도 드러났다.
“아.”
앞에서 작게 탄성이 들리자 펭귄은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투구를 옆에 두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펭귄은 황제가 내리는 검을 하사받고 팔을 그어서 피로 잔을 채웠다. 목숨을 다해 황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이다. 갓 나온 혈액을 주인이 될 자가 마시면서 그의 소유물이 되고, 만약 배신하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그것이 개의 사명. 용의 사명이 신계를 평안하게 다스리는 것이라면, 개의 사명은 그 나라의 안보를 유지하고 용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개들은 대대로 주인을 섬기기 위한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개중에서 문무가 뛰어나고 나라에 대한 충忠이 높은 개만이 선택되어 황가를 보필할 기회를 얻고, 이번 기수에는 유일하게 펭귄이 발탁되어 입궁하게 되었다.
잔은 높은 자리로 올려지고, 고개를 들라는 말에 펭귄은 시선을 올렸다. 황색 곤룡포였다. 황제의 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금빛 용이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시선을 두며 용황의 말을 기다렸다.
“견공의 주인은 짐이 아니다. 재상은 앞으로 나오게.”
그의 느릿한 어조는 별일이냐는 듯 태평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장내는 단숨에 부산스러워졌다. 누가 말할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장 앞쪽에 있던 정승이 한 걸음 나와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하오나 폐하. 개의 일족은 대대로 용을 섬기는 사명을…….”
“짐은 이미 많은 호위를 두고 있네. 재상이 안전해야 내 편히 정사를 볼 수 있을 걸세. 짐이 이런 말까지 해야 들을 겐가.”
하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또 한 명이 나와 말을 덧붙이려는 것까지 차단하자 뒤쪽에서 잇소리가 흘렀다. 가감 없이 반대하는 관리들을 영 언짢게 둘러보던 용황이 팔걸이를 내리치며 성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하명해주시옵소서, 폐하.”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격양된 목소리가 오가던 차에 흘러나온 차분한 말은 일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고, 용황도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있는 재상을 가리켰다.
“견공, 그대의 상전이 될 자이니 속히 예를 갖춰 고하게.”
펭귄은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시선을 옮기는 사이, 못마땅해하는 눈빛이 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는 침을 삼키며 이제부터 모셔야 할 주인을 보았다.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보통 신하들과 다를 바 없는 의복이었지만, 그 정형한 옷으로도 가릴 수 없이 화려한 사람이었다. 문신, 귀걸이, 턱수염까지.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피곤한 듯 깊게 음각을 이룬 눈매는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흠칫.
왜 그 아이가 떠오르는 걸까. 어릴 적, 담벼락 너머로 손장난을 하고 놀던 아이. 밝게 웃는 미소가 눈물이 날 만큼 눈부시던 아이. 가끔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 때 다가가 안으면 품 안에서 서럽게 흐느끼던, 작고 여리고 사랑스럽던 아이였다. 전혀 다른 인상이지만 그 눈이 닮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인데……. 이제는 자랐을 아이는 딱 저 재상과 비슷한 나이일 것이다. 분명 이름이,
“트라팔가 로우. 내 이름이다. 잘 부탁하마.”
그래, 로우였다. 펭귄은 일렁이는 눈을 숨기려 얼른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그 이후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하고, 로우와의 재회는 그리도 정신없이 끝나버렸다.
*
로우와 펭귄은 동네 소꿉친구였다. 하지만 평범하게 옆집에 살면서 알게 된 사이는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의 바깥출입을 엄격히 관리하던 집안에 억눌려 있던 펭귄에게는 이렇다 할 또래 친구가 없었다. 가문의 아이들은 모두 경쟁자였고,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른들이 자꾸만 서로 비교하고 싸움을 붙여서 사이좋던 친구도 앙숙으로 변하던 실정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경쟁이 싫었다. 싸우는 것도, 꼭대기로 가려고 아득바득 남을 짓밟으며 기어오르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날랜 몸으로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원치 않는 여러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로 범벅인 눈빛에 피부가 늘 따가웠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짙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길로 펭귄은 저택을 뛰쳐나왔고, 그때 로우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는 늘어지는 소매를 한 손으로 잡고 느릿하게 먹을 갈고 있었다. 스윽-. 스윽-. 연적에 담겨 있던 청아한 물은 차츰 먹색으로 탁해졌다. 까맣게. 옥색 벼루에 박혀 있는 보석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비쳤다. 그 안에 고인 물은 잘근잘근 씹힌 채 먹에 묻어 검은 눈물을 흘렸다. 애처롭게 파문이 일었다. 로우는 먹을 내려놓고 고운 한지를 펼쳤다. 고급한지는 시중에서 파는 것과 다르게 티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위로 검은 방울이 토옥 떨어져 번지면서 검은 얼룩이 생겼다. 먹물을 먹인 붓으로 한 획을 그었다. 손길은 거침없지만, 섬세했다. 굵고 얇은 붓질이 종이 위에서 피어났다. 의미 없는 선들이 낙서처럼 보이던 것은 팔이 움직일수록 형체를 갖추었다. 그것은 국화였다. 색을 입히지 않은 흰 국화가 만개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줄기가 꺾여 한 송이만 덜렁 놓인, 곧 죽어버릴 국화였다. 붓은 잘린 줄기 끝에서 멈추었다. 먹물이 배어들면서 검은 점이 번졌다. 종이가 축축해지도록 가만히 그림을 내려다보던 로우는 이내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옆으로 치웠다.
“펭귄.”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에 펭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로우의 시선이 그에게 닿아 있었다. 그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눈 밑이 까매서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만 보면 방긋 웃곤 했는데. 하지만 이것은 불충한 생각이었다. 자신은 그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펭귄은 마주치던 눈길을 내려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북부에서 왔다지. 원래는 이곳 사람이었는데.”
“네.”
가문에서 인정받은 펭귄은 백호 가문으로 인도되어 심도 있게 문무를 갈고닦게 되었다. 하지만, 보통 다른 가문으로 유학 가는 아이들에게는 준비시간을 충분히 주는 데에 반해 펭귄은 당일에 통보받아 끌려가다시피 말 위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급하게 옮겨가게 된 이유는 단연 로우 때문이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밤마다 담장을 넘는다는 사실을 들켰고, 그때 만나는 이가 로우라는 것을 가문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었을 때, 종일 감시가 붙어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로우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로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라 하였다.”
뜬금없는 말에 펭귄이 도로 로우를 보았다. 그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이번에는 글을 써 내리고 있었다. 글자를 축약하지도, 늘이지도 않는 단정한 글씨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글을 바라보고 있던 펭귄은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건, 로……!”
“…궁은, 벽에도 귀가 있다. 입을 조심하는 게 좋다.”
익숙하게 이름을 부를 뻔한 펭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이곳은 궁이었다. 곳곳에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는 곳. 궁인들 사이에서 퍼지는 이야기는 저잣거리의 항설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궁에서 나온 말이 용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반면, 이 방안에는 펭귄과 로우뿐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눈은 단 두 쌍뿐.
[네가 날 버렸다고 생각했어.]
펭귄은 모자를 끌어 내려 붉어진 눈가를 숨겼다. 로우는 모른 척 제 앞을 가리켰다.
“여기에 앉아라.”
“…알겠습니다.”
펭귄은 애써 숨을 골라 답하며 책상을 사이에 두고 로우와 마주 앉았다. 그는 펭귄에게 붓 하나를 내밀고 다시금 글을 써 내려갔다. 사실상, 펭귄에게 하는 말을.
[이번에 뽑힌 호위가 너라는 사실을 듣고, 폐하께 널 달라고 부탁했어. 알고 보니 폐하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궁은 처음일 텐데, 어떠하나.”
겉은 처음 알게 된 호위를 챙기는 말로, 실제는 옛 친우를 대하는 글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로우가 계속해서 손을 움직이는 사이, 펭귄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도록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새롭습니다, 대감.”
“하긴, 그렇겠구나.”
[내가 어째서 궁에 있는지, 관리인데도 왜 궁 안에서 지내는지, 지난 십여 년간 있었던 일이 궁금하겠지.]
꿇어 앉아 있는 무릎 위의 손이 움찔거렸다. 사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토끼는 대체로 예술성이 뛰어나 계급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직업을 가진다. 그리고 로우는……. 잠시 망설이던 펭귄은 제 앞에 놓인 붓을 들었다.
[궁금해. 하지만 네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네게 상처를 준 건 나니까. 내 의도였든, 아니든.]
“하지만 제 임무는 대감을 지키는 일이니 어떠한 것에도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로우의 귀가 움찔거렸다. 궁 안이긴 해도 편하게 갓을 벗고 있어서 머리 위로 검은 귀가 뻗어 있었다. 펭귄이 기억하고 있는 귀보다 더 크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새삼스럽게 보고 있는데, 로우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활짝 웃는 미소는 아니었지만, 녹지 않는 얼음 결정 같던 얼굴이 사르륵 풀리는 듯해 펭귄은 순간 뺨을 붉혔다.
“기특한 말을 하는구나.”
[괜찮아. 사실, 널 잊고 있었거든. 예상했겠지만 나한테도 많은 일이 있었어. 네가 사라지고, 얼마 후에 손님을 받기 위해 훈련받느라 바빴어. 접대를 시작한 후에는 더 바빴고. 어차피 널 만날 시간도 없었을걸.]
“…저는 이제 공의 개입니다. 무엇이든 하명해주십시오.”
손님. 접대. 붓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우는, 유곽의 아이였다. 이 나라의 기생은 대부분 토끼였다. 그중에는 몸을 팔지 않아도 자신의 예술적인 재능만으로 먹고 사는 기생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뛰어난 소수였다. 사람들은 대개 민감하고 쉽게 발정하는 토끼를 좋아했다. 수요가 많으니 공급도 많을 수밖에. 그래서 유곽에서는 조금이라도 용모나 재능이 훌륭한 토끼를 데려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로우는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로우는 붓을 부러뜨릴 듯 힘주고 있는 손을 힐끔 내려다보곤 안 그런 척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펭귄을 살폈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몸만 자랐지, 그는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만약 모든 것을 말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낼까.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나를 혐오스럽게 볼까. 나는 왜 굳이, 그를 제 사람으로 두고 싶었을까. 그 무엇도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펭귄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붓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여러 유곽에서 기생들을 모아 궁의 연회에 불려간 적이 있다. 거기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때 난 폐하의 눈에 들었어. 가족들은…전부 죽고 유곽도 사라졌다. 그래서 갈 데 없는 날 폐하께서 거둬주셔서 여기서 지내는 거야. 능력을 인정받아 벼슬을 받아 관리가 된 거고.]
로우는 마침표를 찍자마자 종이를 거둬들여 피워둔 호롱불에 한 장씩 태웠다. 아직 먹도 마르지 않은 종이는 시커멓게 타들어 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실인 양, 흔적도 없이. 그의 노란 안광에 발간 불빛이 스며들었다. 펭귄의 앞에 놓인 종이도 치워져, 그는 더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붓을 놓아야 했다. 로우는 다시 싸느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까지의 필담은 이미 현실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하지만 펭귄은 대화를 멋대로 끝내버린 로우에게 핀잔을 줄 수 없었다. 어떠한 말도, 물음도 하지 말라는 눈빛이니까. 결국 펭귄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감.”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마.”
무의미한 인사가 오가고, 펭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림자의 위치로. 누구의 눈에도 들지 않고 제 주인의 등을 말없이 지키는 충직한 개의 위치로.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주인의 등을 한없이 바라보며 혹시 조금쯤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까, 칭찬 한마디 건네주지 않을까, 홀로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뿐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첫날이 무색하게, 로우는 그 위치답게 바빴다. 대체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용황에게 불려가거나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진행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펭귄은 잘 알지 못했던 주요 인사를 단 며칠 만에 꿰뚫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는 낯빛으로 로우를 대하다가 뒤돌아서면 그를 욕했고, 꼴에 개 목줄을 쥐고 다닌다고 흉보았다. 몇 번이고 이빨을 드러내 그들에게 으르렁거리려던 것을 로우가 나직하게 펭귄, 이름을 부르면 금방 수그리기 일쑤였다. 그도 이런 취급이 익숙해 보였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용황과의 만남이었다. 황제는 그를 대중없이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그를 찾았다. 침전 앞까지 뒤를 따라가던 펭귄을 로우가 뒤로 물렸고, 멀리 떨어진 입구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 탓에 집에서 출퇴근도 못 하고 로우의 옆방에서 지낸 지가 어언 일삭一朔째였다. 어차피 집에 가봤자 싫은 얼굴들만 봐야 하니 불만은 없었지만, 침전에서 나오는 그의 얼굴이 항상 수척해 보여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을 하자니,
“대감, 좀 쉬시는 게…….”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꼴이었다. 펭귄은 그를 강제로 묶어서 쉬게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로우를 쉴 수 없게 하는 행위일뿐더러 그랬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펭귄의 최대 고민거리는 다름 아닌 로우를 쉬게 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잠이라도 편하게 잤으면 해서 매일 같이 불침번을 서며 지키려고 애썼지만, 생각보다 용황의 힘이 세고 그 비호가 남다른지 그를 경계하는 이들이 직접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걸 놓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랜만에 자유시간을 얻어 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숨어들 틈이나 암살하기 좋은 위치 등을 반쯤 직업병으로 둘러보고 있을 때, 한 궁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실례지만, 트라팔가 대감을 뫼시는 견공이 맞으신지요.”
넋을 놓은 채 벽에 새긴 글귀를 보고 있던 펭귄은 공손히 묻는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짚었다. 흉흉한 군복은 아니었지만, 검은 개의 형상이 그려진 옷자락을 위협하듯 휘날리며 잽싸게 돌아보자 반 토막밖에 안 되는 작은 양이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펭귄은 얼른 검에서 손을 떼고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맞습니다. 어째서 절 찾으십니까?”
“그…폐하께서 반 시진 후에 서쪽 연못에 있는 누각에서 독대를 가지자 하시어…….”
이 작은 무수리는 양손을 꼬옥 붙든 채 떨면서도 자신이 할 말은 똑 부러지게 고하곤 말간 눈으로 펭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인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소랑小娘.”
아이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손을 대자마자 퍼뜩 놀라 벌써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펭귄은 허공에 남겨진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여 뒷덜미를 긁적였다. 반 시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저를 찾아다녔을 시간과 누각까지 가는 시간을 합치면 제법 촉박했다. 펭귄은 서둘러 서쪽 연못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연못에서는 이곳, 하늘이 만들어질 때 용이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궁에서도 가장 신성시되며, 본래는 궁의 중앙에 위치하였으나 규모가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서쪽에 치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서쪽은 침전이나 편전과 같이 황제가 활동하는 공간이다. 그 연못에 있는 누각은 작은 연회에조차 사용되지 않아 가장 오래되었는데도 약간의 세월감만 있었다. 그런 곳에서 술판을 벌이면 부정 타게 된다는 일종의 미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누각을 밟는 것도 황제와 그가 허락한 자만이 가능했다.
펭귄은 누각에 서 있는 황제를 보자마자 달려가 계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혹시 그를 기다리게 하는 바람에 경을 칠까 싶어 바로 사죄했지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듯했다.
“이리 와보아라.”
“네, 폐하.”
펭귄은 누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과 지붕은 옥과 금으로 장식되고 커다란 황금용이 눈을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궁에 들어온 첫날 편전 한가운데를 걸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 차마 황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하지만 황제가 재차 편히 앉아 고개를 들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 보게 되었다. 용안은 함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락한다고 해도 그 눈을 똑바로 바라봐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위계 때문이 아니었다. 펭귄은 그의 천안天眼을 마주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번졌다. 길게 찢어진 동공이 펭귄을 탐색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자애로운 눈빛을 가장한 그 속내에는 냉담한 무관심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 차이다. 펭귄은 이 높은 하늘에서 땅끝으로 끌어 내려졌다. 이 자는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왜 로우가 공을 아끼는지 알겠군.”
“예?”
펭귄은 그제야 자신이 황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되었다. 내가 고개를 들라 하지 않았느냐.”
“…황송하옵니다.”
펭귄은 집안의 높은 어르신에게도 대들곤 했지만, 황제는 경우가 달랐다.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아 머릿속에 억지로 주입 당했던 예법에 맞춰 언행을 갖추었다. 독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이미 위압된 펭귄은 손이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왜 로우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긴말할 것도 없겠지. 공은 로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작성해서 짐에게 보고해라.”
기민하게 감지한 낌새를 체 생각하기도 전에, 펭귄은 뒤통수를 뚜드려 맞은 듯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큼 망설임 없는 눈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인 듯, 보였다.
“신은…….”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펭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인가. 용황은 스스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한낱 호위 나부랭이가 어찌할 수 없는 상대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들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절하듯 엎드렸다.
“송구하오나, 폐하. 신은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주인은 오직 재상이옵니다.”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주변 공기는 서릿발치듯 어릿하게 기온이 떨어졌다. 손끝부터 천천히 어는 듯했다. 등줄기에 난 땀이 차갑게 식어서 오싹해진 등골이 아득하게 당겼다. 보지 않아도 펭귄은 그 눈빛에 찢어 죽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황제는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상이 짐의 것이라 해도 말이냐. 이 천하가 모두 짐의 것이라 해도 말이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렇다 하여도 제 임무는 재상을 지키는 것이지,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내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고, 도복의 안감도 축축하게 젖었다. 백호의 무리 속에서 십여 년간 지내면서 서슬 퍼런 눈빛은 질리도록 겪어봤다. 하지만 용의 눈은 달랐다. 호랑이의 눈은 포식자로, 그 앞에 있으면 먹잇감이 되는 착각이 들었지만, 용의 눈앞에서 자신은 개미보다 못한 미물이 되었다. 거상을 앞에 둔 사람처럼, 자신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오만하고, 멸시하는 눈. 비교적 진솔한 개와 호랑이들 사이에서 자란 펭귄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도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다리가 저렸다. 몸에 힘을 억세게 준 탓이었다. 그때, 황제가 일어났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눈길 한 번을 끝으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완고하게 밀어붙일 줄 알았던 펭귄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곧 이해했다. 당장 죽여도 모자랄 불충을 저지른 이 미물은 그럴 가치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투박한 개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로우를 감시할 수단은 펭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았다. 아니, 이미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펭귄에게 떠보듯 감시를 제안한 것은 첫 번째로 그가 어느 쪽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함이고, 두 번째로 로우를 감시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펭귄은 그간의 경험으로 윗사람의 의도를 대강 눈치채는 잔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달려가서 황제를 붙잡고 진의를 물어볼 수도, 그렇다고 이 사실을 로우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무력감이 치솟았다.
*
“꺄아악-!!!”
한 비명이 허공에 애처롭게 울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음성은, 분명 펭귄이 향하는 로우의 처소에서 들렸다. 황제와의 독대로 지칠 대로 지친 펭귄은 그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문으로 가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이 있었다. 다만, 창문을 부셔야 하는 것만 빼면. 그는 단숨에 뛰어올라 창에 몸을 날려서 낙법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무틀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나뒹굴었고, 펭귄은 피어오르는 먼지를 털어내듯 도복 자락을 펄럭이며 검 손잡이를 쥐고 로우의 방에 달려 들어갔다.
“대감, 무사하십…윽!”
그곳에는, 핏빛 토사물이 바닥에 낭자해 있었다.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배를 찢고 그 안에서 갈려 나온 내장들이었다. 원형을 알 수 없었다. 뭉개진 살덩이는 징그러운 것을 넘어 더러웠다. 워낙 형체가 문드러져 처음에는 큰 사냥개나 돼지 같은 동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니, 아니었다. '저것'은 사람의 옷가지를 입고 있었다. 궁녀들의 옷이었다. 방금 들어온 듯한 다른 궁녀는 방 한구석에서 괴롭게 헛구역질을 하며 울고 있었고, 그 앞에 로우가 있었다.
“왔나?”
그의 목소리는 예사로웠다. 반갑다는 듯 옅게 올라간 입꼬리 위로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한 양 반짝이는 눈이 있었다. 해부한 개구리를 자랑스럽게 내미는 아이처럼 천진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붉디붉은 흥분으로 가득.
펭귄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벌어지지 않아 굳은 채로, 가만히. 참혹한 광경을 외면하고 싶어서 주먹을 말아쥔 그는 급히 몸을 움직여 진이 다 빠진 궁녀를 밖으로 내보내며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문을 닫았다. 이 사실이 퍼져나가서는 안 된다. 한갓 궁녀와 높은 관리의 직위는 반발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컸지만, 개미 수천 마리가 코끼리를 죽이는 법이었다. 이미 궁 안에 적이 많은 로우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펭귄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로우에게 물을 정신머리도 없이 시체를 수습하려고 제 도복을 벗어 조각난 살덩이를 담아내었다. 피에 절어 미끄러지는 내장을 억지로 움켜쥐자 장액이 흘러내렸다. 욱-. 구토가 나올 뻔한 입을 손등으로 훔쳤다. 입가에 진한 혈이 묻어났다.
“애쓰는군. 딱히 할 필요도 없는데.”
로우는 어느새 창틀에 앉아 물끄러미 펭귄을 내려보고 있었다. 공허한 눈을 마주했다. 내가 먼지나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나? 피로 어지러운 정신이 둔해졌다. 가끔 선물로 개구리를 주면 눈앞에서 해부해보는 엽기적인 면모가 있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끝나고 나면 미안하다면서 땅에 묻어주곤 했다. 사람을 해치고도 아무 감정도 없는 인형이 아니었다. 착란이 일어나는 눈앞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제게 기대려 하지 않아. 말하려고 하지 않아. 그렇게 울화가 치밀었다. 펭귄은 성큼성큼 다가가 손에 피가 묻은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로우. 대체 십 년 동안, 내가 없는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이렇게 변한 거냐고!!”
그와 산책하러 나갈 때면 자리를 피하던 궁인들, 자신이 말을 걸라치면 도망가고 무서워하던 무수리들, 은근히 수군대는 관리들. 그를 감시하라던 황제의 말. 전부 이상했다. 기묘한 지표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로우는 자라온 환경을 모두 잃었다.
황제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로우가 변했다. 이 세 가지가 펭귄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심장이 저렸다. 꾸역꾸역 씹어뱉은 말들로 가슴이 얹힌 듯 답답했다.
“나에게, 실망했나?”
멀건 눈은 펭귄을 바라보면서 바라보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로우는 그의 몸, 또는 허공 어딘가를 향해서 시선을 애써 피했다. 뾰족하게 솟은 검은색 귀가 뒤로 쳐져 옅게 떨리고 있었다. 목덜미에 난 토끼의 솜털이 곤두섰다. 산해진미도 깨작거리며 마음에 두지 않는 그가 자신만은 신경 쓰고 있었다. 펭귄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움찔했다가 혹시 봤을까 봐 급히 등 뒤로 숨겼다. 잘못을 반성하지도 않는 주제에 혼나고 싶지 않아서 떨고 있는 아이처럼 영악하게도, 로우는 무심한 감정을 눈 안에 담아 숨기고 있었다.
“말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실망하지 않을게.”
로우가 붙잡을 듯 손을 들어 올리자 펭귄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머물 곳을 잃은 다섯 가닥의 꽃 송이는 힘없이 스러졌다. 로우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만히, 미동 없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손대면 산산이 부서져서 바람결에 날아가 사라질 듯했다.
“내가 살던 곳은, 불타 없어졌다. 전부. 어째서인지 손님 하나 없는 유곽에 나 빼고 모두가 있었어. 그 대낮에 아무도 수습해주려 하지 않았고, 나 혼자 들통으로 물을 부어보았지만 터무니없었어. 나중에 불이 어떻게 난 거냐고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뿐이었지.”
시장의 뒷골목에 위치한 유곽 주변에는 유동인구가 꽤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지나가던 단골을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렸지만, 그는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버렸다. 모래밭에 나뒹군 로우는 미리 길어놓은 물을 전부 사용했지만, 겨우 끈 불씨는 다시 옮겨붙어 흉흉하게 자신까지 삼키려고 했다.
“그렇게 불길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전부 시커멓게 재로 변해서, 내가 손님을 받기 시작하던 해에 받은 옥가락지까지 그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어. 그런데 웃긴 건, 금고가 부서져서 그 잔재 사이에서도 금화는 빛나더라고. 그걸 보고 온갖 잡짐승들이 다 달려들어서 하나씩 챙겼고, 난 그걸 볼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때마침, 한 관리가 황명을 들고…왔더라고.”
성인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로우는 몸을 팔지 않는 일패기생一牌妓生으로, 뛰어난 문장가이자 춤선이 곱고 현을 잘 켜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일패기생은 매춘을 하는 것 자체를 불명예로 생각하며, 그것을 제안한 이는 아무리 높은 집 자제여도 가차 없이 내쫓는다. 그래서 황제가 그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 로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밀어버리고 말았다. 잠잠할 때가 없던 그날의 연회에서 처음으로 정적이 흘렀다. 딸꾹. 술이 거나하게 취한 대신이 자신의 딸꾹질 소리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떨어뜨렸다.
“네가 알던 트라팔가 로우는, 그날 죽었어.”
죽는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로우를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돌려보냈고, 그 뒤로 수차례, 궁으로 오라는 황명을 내렸다.
펭귄은 딱딱하게 굳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자의 그림자 아래로, 분노에 찬 눈이 파들거렸다. 머리끝까지 오른 열기에 눈가가 빨개졌다. 귀가 바짝 서면서 모자가 들썩였고,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붙잡으며 목울대로 들끓는 소리를 냈다. 힘주어 다문 이빨은 날 선 송곳니를 드러내며 뿌드득 갈렸다. 로우는 그런 성난 짐승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내가 더럽지 않아? 실망하지 않았어?”
옷을 뜯어 발겼다. 하지 말라고, 싫다고 저항하는 입은 궁인들에게 막히고 몸이 뒤집어졌다. 더러운 구더기가 온몸을 기었다. 하부를 가르고 들어왔다. 붙잡혀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 팔을, 로우는 천천히 뻗어 펭귄의 뺨을 쓸었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그랬다. 이곳에서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살아 있었다. 숨 쉬고 있었다.
다만
죽은 듯이
살아만 있었다.
“공공연하게 몸이 팔렸어. 폐하께, 그리고 그 사람이 명하는 사람에게. 삼패기생처럼 여기저기.”
로우는 황권을 높이고 신하들의 충성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름뿐인 재상으로, 하지만 실상은 황제가 원하는 이에게 다리를 벌려야 하는 천한 매춘부로. 그의 몸은 남에게 손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더럽혀졌다. 이런 나를, 너는 어떻게 볼까. 로우는 천천히 그의 모자를 벗겼다. 툭,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펭귄은 꼬리도, 귀도, 축 늘어뜨린 채……,
“…로우.”
울고 있었다. 처량하게. 무력하게. 그는 도저히 슬퍼서 어쩌지 못하고 아까운 눈물을 떨어뜨렸다. 로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이었다. 이 이야기의 어느 점이 그를 울린 거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심장이 미약하게 저렸다. 흘러내리는 감정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의 품으로 안겼다.
“늦어서, 미안해.”
펭귄은 목이 메어 구멍 안쪽이 시큰거렸다. 목젖이 울컥거려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로우는 똑똑히 들었다. 알 수 있었다. 이게…‘위로’라는 것이구나. 낯선 단어였다. 궁 생활을 하던 초반, 자신의 기악 실력에 다가왔던 이들도 이제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본다.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켜주던 이는, 알고 보니 돈이 없어서 사들이지는 못하지만 제 몸을 노리고 붙어 있던 사람이었다. 으슥한 곳에서 습격받아 강제로 옷이 벗겨진 적도 여럿 있었다. 자신은 궁 안의 모두가 아는 창놈이었다. 오직, 펭귄만을 제외하고.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다.
“안아줘.”
로우는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발정 난 암컷처럼 그에게 몸을 비비적대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펭귄과 피부를 맞대자 몸을 더럽히는 검붉은 점액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아니, 점액이 그에게로 퍼지는 듯도 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게, 로우는 게걸스럽게 그의 입으로 달려들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끈적한 살덩이를 섞었다. 옥죈 몸을 끌어내리자 순순히 딸려오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어서, 어서 네 혀로 더러운 것을 핥아줘. 빨아줘. 온몸을 네 색으로 물들여줘.
“날…위로해줘.”
보채듯 가슴팍을 열어젖혔고, 두 몸이 섞였다.
*
그렇게, 시간은 처음으로 돌아온다.
가파른 숨과 코에 찌든 피 냄새. 장식장에 있던 검으로 가차 없이 베어버린 몸뚱어리. 찢어진 곤룡포. 사람은 이렇게도 쉽게 죽었다. 불타버린 그 사람들도, 드높다던 용도, 그 누구든지. 로우는 피에 절은 몸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펭귄을 안았다. 칭찬받을 기대에 잔뜩 부푼 어린아이처럼,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펭귄이 이곳에 온 이래로, 그가 사라지고 혼자 담벼락 안에 남겨진 이래로, 처음 짓는 미소는 어색하게 입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안의 눈동자는 서글프도록 붉은빛이었다.
“가자. 둘만 있는 곳으로 가자. 방해되는 건 다 죽여버리고, 우리 둘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자.”
여러 뜀박질 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은 짧고, 생각할 것은 많았다. 펭귄은 혼란스러운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는 하나 같이 황제를 부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견공의 주인은 짐이 아니다.]
나의 주인님. 나의 황제.
[재상이 짐의 것이라 해도 말이냐.]
개의 사명은 죽음으로써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로우를 뒤에 숨기며 검을 빼 들었다.